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한반도의 포성은 멈추었지만, 앞서 12편에서 살펴보았듯이 남겨진 상처는 너무나도 깊었습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국민들은 당장의 굶주림과 싸워야 했고, 국가의 기반을 다시 세우는 일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이러한 혼란과 위기 속에서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전쟁의 상흔을 수습하고 민생을 돌보는 대신, 장기 집권을 위해 권력을 독점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전쟁을 겪으며 국가의 안보가 최우선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되던 독재 체제는, 결국 1960년 봄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는 폭발을 맞이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국민이 주권자임을 온몸으로 증명해 낸 위대한 이정표, 4·19 혁명의 긴박했던 순간을 들여다봅니다.

1. 갉아먹힌 민주주의와 곪아 터진 권력의 탐욕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우리 헌법은 분명히 민주공화국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여당인 자유당은 권력의 자리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 변칙적인 개헌을 일삼았습니다. 전쟁 중 피란 수도 부산에서 군대를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협박했던 발췌개헌(1952),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황당한 논리의 사사오입 개헌(1954)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독재의 탐욕이 극치에 달한 사건이 바로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대통령 선거였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자유당은 이승만이 사망할 경우 권력을 승정할 부대통령 자리에 이기붕을 무조건 당선시켜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들이 벌인 짓은 눈을 의심케 할 정도였습니다. 투표함에 미리 야당표를 무효로 만들거나 여당표를 무더기로 넣어두는 '무더기표 투입', 3인조 또는 9인조로 조를 짜서 서로가 여당을 찍는지 감시하게 한 '조별 투표', 투표 결과를 조작한 '통계 조작' 등 인류 선거사에서 보기 드문 무소불위의 부정선거를 자행했습니다. 내가 만약 그날 투표소에서 내 주권이 처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보았다면, 분노로 온몸이 떨렸을 것입니다.

2.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소년, 도화선이 된 외침

정권의 뻔뻔한 부정선거에 가장 먼저 분노를 터뜨린 것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선거 당일이었던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정부는 이 평화적인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수많은 학생이 체포되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정권은 이 시위를 '공산주의자들의 배후 조종에 의한 폭동'으로 몰아가며 강제로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오래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약 한 달 뒤인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참혹한 모습의 시신 한 구가 떠올랐습니다. 3·15 시위 때 실종되었던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김주열 군이었습니다.

소년의 눈에는 경찰이 쏜 최루탄이 그대로 박혀 있었습니다. 이 충격적인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전국으로 보도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겉잡을 수 없이 타올랐습니다. "내 자식 같은 아이를 전경들이 저렇게 죽였다"는 분노는 마산을 넘어 서울로, 그리고 전국의 대학교와 고등학교로 들불처럼 번져나갔습니다. 침묵하던 광장이 증오와 정의의 함성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3. 4월 19일 피의 화요일, 그리고 "국민이 원한다면"

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는 수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는 거대한 시위 행렬로 가득 찼습니다. 이들은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향해 평화적인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정권의 대응은 잔혹했습니다. 경찰은 비무장 상태의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습니다.

거리에 붉은 피가 낭자했고, 이날 하루에만 서울에서 100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광장을 진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불義에 맞선 시민들의 의지는 총칼보다 강했습니다. 초등학생 아이들까지 "형과 누나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며 거리로 나왔고,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단까지 시위에 동참하여 "대통령은 물러가라"며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계엄군으로 투입된 군인들 역시 주권을 외치는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기를 거부하고 중립을 지켰습니다. 결국 고립무원에 빠진 이승만 대통령은 이튿날인 4월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 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야했습니다. 우리 국민의 힘으로 독재 정권을 끌어내린 역사의 대전환이었습니다.

4.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출발점

4·19 혁명은 아시아 현대사 전체를 통틀어 시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독재 권력을 무너뜨린 최초의 성공적인 민주주의 혁명입니다. 왕조의 신민도 아니고, 식민지의 노예도 아닌, 1948년 제헌 헌법에 명시된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누구인지를 온 세상에 똑똑히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이 혁명 이후 수립된 제2공화국 장면 내각은 사회적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봄이 잠시 유예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4·19 혁명이 남긴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헌법 전문에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장이 당당히 살아 숨 쉬고 있듯, 이때 뿌려진 주권재민의 씨앗은 훗날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사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평범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로 지켜낸 1960년의 봄은, 권력은 결코 국민을 이길 수 없다는 영원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핵심 요약

  • 1960년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장기 집권을 위해 3·15 부정선거라는 전대미문의 선거 조작을 감행하여 국민적 분노를 샀습니다.

  • 마산 시위 중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되었습니다.

  • 4월 19일 경찰의 무차별 발포라는 유혈 사태 속에서도 학생과 시민, 교수단이 끝까지 저항하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독재 정권이 무너졌습니다.

다음 편 예고

다음 14편에서는 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의 열망 뒤에 찾아온 군사 정변의 혼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을 완전히 탈바꿈시킨 눈물겨운 여정인 "한강의 기적과 경부고속도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눈물겨운 경제 발전"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댓글 유도 질문

부정선거에 맞서 펜 대신 총칼과 최루탄 앞에 맨몸으로 나섰던 당시 학생들의 용기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4·19 혁명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에 대해 의견을 댓글로 나누어주세요!